"우리의 상상력을 사로잡으려는 이런 문화에서 우리는 예술을 비롯한 여러 활동에서
기독교적 상상력을 볼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우리의 상상력이 그 포로 상태에서 안주하고 있을 때에는
특히 그래야 한다. 곳곳에 새겨진 형상들과 소비주의 우상이 판을 치고 있는 문화에서
우리는 직장, 환경, 정치의 영역에서 기독교적 행습이 가시화되어 우상을 무너뜨리고
하나님 나라의 경제학을 불러일으키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149쪽.
기독교 세계관 분야의 핵심 인물이자 <그리스도인의 비전>의 공저자 브라이언 왈시의 책이 최근에 한국에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브라이언 왈시와 그의 아내 실비아 키이즈마트가 함께 저술한 책이다. 부부가 함께 쓴 책이라니! 생각만해도 부럽다. 그런데 책 제목이 심상치 않다. 아니 IVP 편집 및 출판부에서 정한 책 제목이 심상치 않다고 해야 정확할 것 같다. <Collosians Remixed>를 <제국과 천국>이라는 이름으로 대체했으니, 그리고 표지 배경과 텍스트 칼라도 검은 바탕에 빨간 글씨다. 이정도면 뭔가 도전적인 느낌이 들기에는 충분해 보인다. 구입해야 할까? 순간 망설여졌다. 그러나 나는 이전부터 기독교 세계관 학자인 브라이언 왈시의 이름에 현혹되어 있었던지라 이 책을 어쨌든 읽어야 겠다는 생각에 구입하고야 말았다. 그런데 제목에서 느꼈던 그 염려는 이 책을 펴서 읽는 과정 중에 터지고야 말았다. 내가 순진해서인지는 몰라도 아무래도 이 책은 이념 대립이 첨예한 한국적 상황에서는 논쟁의 불씨를 일으킬 수 있는 도발적인 책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저자가 말하는 제국이 오늘날에도 우리 일상과 너무나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제국은 1세기 상황에서는 '팍스 로마나'를 외치던 로마 제국이었고, 21세기에는 '팍스 아메리카나'를 지향하고 있는 미국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제국적 이데올로기에 맞서서 반제국적인 이데올로기를 주장하는 갈등론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것인가?
1. 제국과 천국?
1) 제국 = 소비주의 세계, 불안과 허무로서의 포스트모더니티가 지배하는 나라
이 책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기에 앞서서 제목이 가지고 있는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저자는 책의 서두에서 자율성을 의심하고 유신론으로 돌아오겠다고 고백하는 윌리엄을 소개하면서 시작한다. 윌리엄은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자율성이 가진 위험성을 깨닫고 유신론을 포용할 것을 고백했다. 그러나 그는 성경과 성경 해석의 권위자들이 주장하는 절대주의가 자신이 소비주의 제국에서 마주쳤던 억압적이고 권위적인 세력과 유사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워 한다. 왈시는 이러한 윌리엄을 소개하면서 자연스럽게 미국이 가지고 있는 자본주의의 신화를 소개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소비주의적 접근이야말로 인간의 자율성을 부추켜서 포스트모더니즘의 맥락에서 '선택'할 수 있는 하나님을 가능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그는 바로 '미국'이라는 제국이 소비자 중심에 맞춰진 하나님이자 포스트모던 시대에 만들어낸 하나님을 믿도록 부추키는 장본인이라고 지적한다.
2) 천국 = 창의적인 상상력과 실천적 지식을 회복하고 대안 공동체로 살아내는 것
그렇다면 제국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저자의 주장을 요약하면, 천국이란 제국의 자본주의와 포스트모던적 불안과 허무주의에 맞서서, 대안으로서의 기독교적 윤리(탈퇴, 공동체, 해방, 고난)를 구현해 내는 것이다. 그리고 획일적인 쾌락과 탐욕을 부추킴으로서 상상력을 차단하는 문화를 거부하며, 성경의 진리에 흠뻑 젖어서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와 창조의 원리를 통해 상상력을 회복함으로서 지식을 실천으로 구현하는 것이다. 그는 "우리의 과제는 ... 그것(성경)에 충실하되, 변화된 문화적 맥락에서 이 이야기가 어떤 모습을 취할지 상상력을 동원해서 분별하는 일이다"(228쪽)라고 말한다. 이처럼 저자의 주된 관심은, "창조적인 상상력과 실천적 지식을 구현하는 기독교 대안 공동체를 모색하는 것"에 있다.
2. 책의 내용이 너무 도전적인 것 아닌가? - 그렇기도 하고(yes), 아니기도 하다(no)!
1) Yes! 도전적인 이유? - 저자는 "성경 이야기가 제국 이야기에 대항하는 이야기"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 책이 우리 시대에서 도전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가 말한 것처럼 "성경 이야기를 제국 이야기에 대항하는 이야기"(107쪽)로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책에서 소개하는 제국이 대표적으로 미국이라고 노골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또한 골로새서의 탈굼을 소개하면서 "맥세상", "펜타곤", "디즈니랜드", "AT&T"가 소비주의를 부추키는 대표적인 기업이라고 명시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저자의 주장은 우리에게 너무나 도전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을 이념 대립이 뚜렷한 한국적 상황에 대입했을 때에는 더욱 위험 수위가 높아질 것은 안봐도 뻔해 보인다.
그렇다면 저자가 성경 이야기(골로새서)를 제국에 대항하는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고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주장에 따르면, 나라나 기업을 명시적으로 언급한 것은, 사도 바울도 그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되었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만물이 주님의 것이며 그분께 통치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제국이 부추키는 욕망은 만물을 온전하게 회복시키는 성경적 정신과는 상반될 뿐만 아니라 주인의 자리에 서서 파괴한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대항했다고 말한다.
또한 저자는 골로새서를 읽는 독자로부터 현실에 대한 민감성을 갖게 하기 위해서 대상을 명시적으로 언급했다고 말한다. 그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골로새 교회를 둘러싼 모든 왕권, 주권, 통치자들이 '영적 특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저자는 마귀의 파괴적 힘이 개인적, 구조적 차원 모두에서 나온다는 것을 말하면서, 우리의 삶의 구조가 제국의 우상숭배적 영에 의해 주도되는지,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주도되는지 면밀히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당시 제국이 원했던 것은 종교가 사적 영역을 넘어서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이러한 억압에 반하여 사적 영역을 넘어 공적 영역에서도 창조적 역할을 감당해서 총체적인 비전을 회복해야만 했다. 이런 점에서 저자의 주장(세계관)은 골로새서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를 제공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직접적인 비전을 발견하도록 대안(방향성)을 제공함으로서 처방하려는 데에 있다. 그래서 이러한 주장이 관념에 머물지 않도록 바울의 주장(골2:4)을 빌려 날카로운 통찰을 제공하는데, "복음의 진리가 공동체의 삶으로 분명히 구현되지 않을 때에는 그 "철학"은 언제고 다시 등장"(193쪽)한다고 말한다.
2) No! 도전적이지 않은 이유? - '사랑의 아들의 나라'(골1:13)는 구속의 포용력을 통한 평화적 회복이기 때문이다.
왈시 부부는 푸코가 말하는 억압적인 진리 체계와 기독교 진리의 유사성을 설명하면서, 기독교 진리가 역사 속에서는 전체화를 강요하고 억압적인 방식으로 사용된 적은 있었지만 성경의 전통에는 그런 성향이 없다고 말한다(181쪽). 성경 이야기는 하나님의 창조 의도에 뿌리박고 있기 때문에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편향되게 사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성경 이야기 전반에 걸쳐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과 피조물의 고통에 공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분 자신도 그 고통을 직접 체험하고 계신다는 점을 언급한다. "그분은 백성의 죄를 짊어지는 종의 모습을 지닌 하나님이시다"(사43:24)(182쪽). 왈시의 주장에 의하면 고난에 뿌리밖고 그것에 민감한 이야기, 피조물의 구속을 목표로 하는 성경 이야기는 파당성의 이익을 위해 악용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183쪽).
이렇게 성경 이야기가 하나님을 고통에 깊이 관여하는 존재로 묘사하고, 폭력을 인간 곤경의 뿌리로 보고다면, 그 성경 이야기는 본질적으로 모든 이를 폭력적으로 대하는 것을 금하는 세계관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이러한 '사랑의 아들의 나라'가 "포용과 용서를 근간으로 삼아 이방인과 유대인, 할례받은 자와 할례받지 못한 자, 야만인과 스구디아인, 종과 자유인 모두를 껴안는다"(골3:11)고 말한다(192쪽). 이처럼 왈시는 칼에 대항하여 칼을 들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동시대의 문화적 변질을 거부하되 사랑의 아들의 나라의 정신을 통해 평화적으로 회복을 시도하자고 말한다.
3. 탈굼(targums)의 발견
"랍비들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히브리어를 잘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고대의 텍스트를 그들의 언어로 번역해 주었다. 문자적 번역이 아닌 고대의 텍스트를 급변하고 있는 당대의 맥락에 적용하고 당대의 관용어로 표현하는 등 그 시대에 맞게 번역해 주었다. 이런 해석의 결과물을 그들은 탈굼(targums)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텍스트를 길게 의역한 것을 일컫는 히브리 말이다."(60쪽)
이 책에서 흥미로운 것은 저자가 만든 탈굼의 발견이다. 왈시는 이상의 탈굼 원리에 따라서 골로새서를 새롭게 의역한다. 그래서 그의 탈굼을 읽으면 성경이 오늘날의 언어로 분명하게 이해될 뿐 아니라, 무엇이 우리 시대의 과제이자 도전인지를 발견하게 해준다. 그런데 문제는 그 내용이 너무 방대하다고 할까? 그리고 현존하는 문화에 대해 지나치게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런 점은 그의 성급한 주관적인 해석이 너무나 많이 덧붙여진 결과물은 아닐까? 그렇다면 과연 이런 해석이 보편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도 공명할 수 있을까? 이처럼 그의 탈굼은 여러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을 요구한다. 어쨌든 그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 진지하게 답변하는데, 탈굼이 너무 길고 방대하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자신의 탈굼이 구약적 의미를 함축한 결과물이라고 응답하며(79쪽), 동시대의 문화에 대해 너무 명시적인 점에 대해서는 바울도 만물의 통치자가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리고자 당대 문화에 대하여 명시적으로 들리도록 말씀을 기록했다고 대응한다.
사실 성경을 오늘날의 언어로 쉽게 이해하고자 번역한 성경은 많이 있는 편이다. '현대인의 성경', '쉬운 성경',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등 이러한 성경은 동시대의 언어로 풀어서 독자가 쉽게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그렇다면 탈굼이 가지는 의미는 어떤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왈시가 소개한 탈굼의 특징처럼 당대의 도전이 오늘에도 분명하게 존재하고음을 독자에게 알리는 일일 것이다. 그는 탈굼을 통해 당시 골로새 교회를 둘러싼 로마의 문화와 21세기의 미국 문화를 정확히 일치시키려고 했다. 이를 위해 팍스 아메리카나, 펜타곤, 디즈니랜드, AT&T, Apple 등 그 대상을 적나라하게 거론했다. 뿐만 아니라 독자들에게 이러한 시대적 과제에 직면하게 하고 기독교적 평화와 화해가 실현되기를 촉구하도록 부탁한다.
나는 이러한 탈굼이 정확히 어떠한 (객관적인) 원리와 공식을 갖지 못한다는 데에서 다소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해석자의 전제에 따라서 본문이 오용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알고 신중한 주의가 필요함을 말하고 싶다. 그러나 독자들중에 이전에 성경 본문을 개인적인 의미로만 축소하거나 현 시대와 동떨어진 이야기로만 다루었다면, 탈굼이 현대의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맥락에 맞추어 성경 이야기를 분명하게 직면하게 해준다는 점은 매력적이다. 왜냐하면 독자들로 하여금 성경을 직접적으로 접근하고 실제적으로 반응하도록 이끌어 주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저자 스스로는 자신의 탈굼이 상상력의 훈련이긴 하지만 텍스트에 충실한 접근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한다(248쪽). 이런 점에서 볼 때 탈굼이 지닌 장점, 곧 텍스트에 충실한 상상력을 활용한다면 오늘날의 청중에게 좀 더 밀접하고 창의적인 방법으로 성경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 것 같다. 여전히 조심스러운 것이긴 하지만!

4. 변혁하지 않으면 변질된다.
저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상대적이고 관념적인 지식 체계에 반하여 기독교적 진리는 공동체의 삶으로 분명히 구현되는 실천적 지식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철학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의 가치들이 가지고 있었던 주지주의적 한계들을 지적하면서, "우리가 바른 신학만 갖게 되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든든한 토대가 놓일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며 오직 공동체를 통해 진심어린 격려와 사랑을 체험할 때에 가능하다"고 말한다(221쪽). 그리고 진리가 온전히 알려지려면, 공동체가 육신의 형태로 나타나야 한다고 말한다(222쪽). 만일 공동체(교회)가 그 진리의 구현체가 되지 못하면, 다른 철학과 세계관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그래서 저자의 최종 관심과 목적은 신앙 공동체가 성경 이야기에 충실하면서도 변화된 문화적 맥락에서 상상력을 동원해서 사는 것이다(228쪽). 성경적 인생관으로 무장하고 성경 시대 이후에 펼쳐진 교회 역사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는 이것을 혁신과 일관성 사이에서 절묘하게 춤을 추는 역동적 접근이라고 말한다(229쪽).
5. 구체적인 삶을 살아내는 공동체: 탈퇴, 공동체, 해방, 고난의 윤리
1) 탈퇴의 윤리
사람은 본래 체질적, 구조적으로 어떤 형상을 반영하게 되어 있다. 자신의 삶을 어떤 권위에 뿌리박도록 의존하게끔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모든 인간은 종교적 존재(Homo religious)이다(281쪽). 이러한 인간은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는데 대개는 잘못된 것을 취하여 우상숭배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우상숭배는 역동성이 있어서 인간을 죽음의 길로 인도한다. 그것은 단절의 연속을 가져온다. 그리고 가장 위험한 것은 상상력을 억압함으로서 제국에서의 삶을 정상적인 것으로 만든다. 저자는 이러한 점을 경고하면서 이것에서부터 탈퇴하라고 말한다. 우리의 생명을 그리스도에게서 단절시키는 제국의 소비주의 문화를 거부함으로서 성적인 죄, 경제적인 탐욕, 폭력의 담론에서 탈퇴해야 한다(291쪽).
2) 공동체의 윤리
바울은 교회를 제국을 대체하는 대안 공동체로 묘사하는데, 이 교회는 새로운 창조 세계를 위한 새로운 인류이다(299쪽). 이러한 새로운 공동체는 무엇보다 십자가의 용서와 사랑에 기반에 서서 끊임없이 '서로를 참고 견디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303쪽). 용서한다는 것은 관계를 새롭게 회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의 관계로 서로를 알며, 이 세계를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한 선물로 받음으로서 모든 영역 속에서 사랑의 생태학을 추구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 모든 것이 가능한 힘은 '예배'에서부터 나온다(342쪽).
3) 해방의 윤리
저자는 오늘날에도 노예가 존재하는데, 그들은 바로 최저생계비를 벌기 위해 극한의 고통을 견디고 있는 단순노동자들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 우리의 노예들이라고 지적한다(369쪽). 당황스럽다. 내가 그들을 노예로 만들고 있다고? 그의 대답에 따르면, 우리가 월마트나 나이키 등의 매장에 들어가서 유행에 맞는 옷을 구입하는 행위가 그 공장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을 노예로 만든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는 선택의 자유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제국의 논리에 빠져서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믿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탈퇴의 윤리를 좇는 가정과 공동체가 필요하다. 이러한 대안적인 공동체가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에 충실한 상상력을 가질 때 제국의 통치에서 해방된 아이들을 낳게 된다(376쪽).
4) 고난의 윤리
성경 이야기는 온통 고난받는 하나님, 곧 깨어진 세계와 화해하기 위해 아무것도 아끼지 않는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393쪽). 바울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것이 자신의 몫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공동체가 예수와 동일시되어 적대적인 세상 속에서 고난을 경험하라고 부탁하는 것이다(395쪽). 이처럼 바울은 공동체가 믿음 안에서 성숙하도록 영광의 소망을 바라보며 메시아의 고난에 동참하시는 하나님 이야기에 우리를 초청하고 있다(399쪽). 이러한 바울의 권면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삶을 바라는가?
바울은 제국의 깃발 아래서 고난이 아닌 번창하는 교회를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제국과 화목하게 지내는 공동체를 바라보며 어떤 마음을 가졌을까? 바울이 쓴 골로새서는 우리에게 제국의 권력자와 통치자들에게 대항하도록 이끌고 있다(402쪽). 우리는 제국이 부추키는 탐욕과 폭력을 거부하고, 군사력이 아닌 십자가를 통해 화해와 평화를 구해야만 한다. 이러한 공동체는 복음을 선포하고 실천하는 가운데 제국의 손에 억압당하는 자들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는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대 속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탈퇴, 공동체, 해방, 고난의 윤리를 통한 평화를 이루는 삶을 살아야한다.
*최근 지인으로부터 맥북을 중고로 구입했는데, 이 책을 읽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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