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분은 우리를 자녀 삼으실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그 아들의 영을 들여놓으시며,
그때부터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켜가신다."(70쪽)
*한 문장 요약
"우리 삶의 주인이시며 중심이신 그리스도와 아름다운 믿음의 관계를 맺으면
변화를 받아 예수님을 닮은 제자로 살아가게 된다."
1. 자기 계발은 "그리스도로부터" 나온다?
'자기 계발'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 보다도 높은 요즘인 듯 합니다. (10월 31일 날짜로) '삶의 주인'이라는 단어로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보니, 가장 먼저 제가 좋아하는 시골의사 박경철 원장의 신간 <자기 혁명>이라는 책에 관한 글이 보이더군요. 그 글의 내용이 궁금하여 살펴보니, 누군가 박경철 원장의 책을 읽고 서평을 쓴 글이었는데, 요약하자면 "절망 속에 있는 청년들이여, 꿈을 말하되 철저한 댓가를 치루며 치열하게 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곧 변화를 위해서는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어 책임있게 살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네요. 그리고 실제적으로 자기 계발을 어떻게 이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방법과 원리들을 소개하는 내용이 뒤를 이었습니다. 저는 그 책을 직접 구입해서 읽어보진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평가를 내린다는 것은 섣부른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책이 자기 계발 도서 분야에서 요즘 베스트셀러에 올랐다고 하지요? 청소년들과 청년들에게 늘 희망을 주려고 노력했던 박경철 원장이 쓴 자기 계발 도서라면 꼭 한 번 읽어봐야 할 책인것 같네요.
그러나 저는 자기 계발 도서들이 가진 과장된 제목들, 확실한 변화가 일어날 것처럼 가정하는 제목들에 조금 회의적인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저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전에 저는 무언가를 야심차게 계획하고서 대부분 작심삼일에 그치고 말았었습니다. 물론 실천력이 부족한 제가 문제인데 누굴 탓하겠습니까?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하고 있는 사람들이 버젓이 존재하는 것을 볼 때 작심삼일하고서 포기하는 것은 분명히 저의 문제이겠지요. 그러나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묻고 싶군요. 그게 과연 저만의 문제인가(요)? 새벽 시간에 다니는 영어 학원, 다이어트, 일주일에 책 한권 읽기 등등 이 모든 일들을 시도해 본 사람이라면 작심삼일은 우리의 친근한 고향 친구와도 같다는 점에 동의할 것입니다(뭐, 아닐수도 있구요).
자. 그렇다면 과연 박경철 원장의 신간이 그 동안 우후죽순으로 출간되었던 자기 계발서들과는 어떤 차이점을 가지고 있을까요? 저는 그게 궁금합니다. 굳이 저자의 이름을 걸고 혹은 '자기 혁명'이라는 도발적인 주제를 내세워서 자기 계발서를 출간할 이유가 있었을까요? 이미 나와 있는 자기 계발서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덧붙여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제자들이라면 이러한 책을 통해 어떤 유익을 얻을 수 있으며, 신앙을 통해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다 보니 꼭 박경철 원장의 <자기 혁명>의 관한 내용을 다루려는 것 같지만 아닙니다;;)
어쨌든 제가 이런 질문을 하는 핵심적인 이유는, 그동안 자기 계발서가 가지고 있었던 본질적인 성격에 대한 의문들 때문입니다. 그동안 자기 계발서들이 계속해서 말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나시는지요? 적어도 그것은 부단히 자기를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어서 철저한 '자기 관리'를 해야한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원리에 따르면 자기 '통제'가 곧 자기 '성공'을 가져옵니다. 자기 계발서 중의 대표적인 책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원리>를 봐도 성공에는 분명히 나름의 '원리'가 존재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분명히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자기 계발서 안에도 분명한 '세계관'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좀 더 엄밀히 자기 계발서에 담겨져 있는 원리를 살펴보면, 그 안에 '종교'가 담겨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 계발서에서 말하는 자기 '관리', 자기 '통제'는 하나의 원리이기 이전에 '종교'의 문제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기 계발서가 변화를 위한 동력을 무엇으로 보고 있는지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보통 자기 계발서에서는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 되어야 함을 강하게 주장합니다. 이것은 당연한 주장이지요. 자기를 관리하고 변화시키고자 하는데 자신이 아니고서야 그런 일을 누가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사는 사회는 치열한 경쟁사회입니다. 경쟁사회에서는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 자력으로 투쟁하는 것은 당연한 일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이지요. 하물며 이러한 시대의 흐름의 혜택을 받아 인기를 누리고 있는 자기 계발서라면 삶의 주체의 중요성을 얼마나 강조하겠습니까? 이상적인 꿈을 말하는 주체, 곧 자신이 변화의 주인이라는 주장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삶을 살게된 사람의 입장이라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아까 자기 관리와 통제는 하나의 '원리'이기 이전에 '종교'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없는 인생이 자기 변화의 동력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는 것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는 인생의 입장에서는 자기 변화의 동력은 자신일 수 없습니다. 성경은, 지음을 받은 사람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고 분명히 단언합니다(갈2:20). 피조물로서의 사람은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내 삶의 주인인가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오직 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해 하나님이 그 인생의 주인이 되십니다. 이것이 크리스찬들에게는 당연한 '종교'이자, '세계관'인 것이지요. 그러나 자기 계발서들은 줄곧 이러한 중심을 변두리로 전락시켰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없는 삶을 당연히 여기고 그런 삶을 부추킵니다. 그래서 크리스찬과 넌크리스찬들 사이에는 깊고도 넓은 빙하틈과 같은 '정체성'의 차이라는 간격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크리스찬들은 자기 계발의 동력이 '나' 자신이 아니며, '하나님'이 되셔야 함을 먼저 분명하게 인식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이 중요한 것은, 이것이 종교의 문제이기도 하거니와 변화의 동력과 올바른 목적까지도 오직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제가 말하고 있는 '자기 계발'은 인생의 주인을 누구로 알고 있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목적을 추구합니다. 일반적인 넌크리스찬들의 변화의 동기와 목적은 이기심 혹은 쾌락주의, 좀 더 고상하게는 대의나 이타적인 고결한 희생 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넘 부정적인가요?). 존 스토트의 이 책에서는 냉엄한 현실주의에 입각해서, 인간은 자기에게로 굽어져 있는 타락한 존재라고 말하면서, 모든 인간이 이기적인 야망과 명성 혹은 기타 대의 등을 위해서 살아간다고 말합니다(161-162쪽). 물론 이러한 평가는 단순화시킨 면이 있지요. 그러나 근본적으로 크리스찬의 동기와 목적은 하나님없는 인생과는 다른 방향을 추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자들이 자기를 변화시키는 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라고 믿을때, 그 목적 또한 하나님을 위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 안에서 변화를 추구하는 자기 계발, 그 원천과 목적은 바로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표현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된 삶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성장이지요. 내가 몸부림을 치며 쥐어짜내는 것이 아닌,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이 인도하시는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자기 계발(제자로서의 성장)은 오직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것입이다. 주변이 아닌 그리스도와의 근본적인 중심, 관계가 잘 맺어져 있기만 하면 삶의 풍성한 열매는 따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이 책은 너무나도 훌륭한 자기 계발서(?)가 될 수 있다고 보여집니다.
2. 중심이자 목표이신 그리스도
서론이 너무 길었던 것에 양해를 구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되는 것은, 이 책이 가지고 있는 핵심 주제 때문입니다. 존 스토트는 이 책의 제목을 "Life in Christ"라고 정했습니다. 직역하면 그리스도안에 있는 인생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는 우리 인생의 중심에 그리스도를 모시면 그리스도를 닮아간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책의 내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우리 삶의 주인이시며 중심이신 그리스도와 아름다운 믿음의 관계를 맺으면 변화를 받아 예수님을 닮은 제자로 살아가게 된다"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닌 그리스도이십니다. 나는 질그릇일 뿐 그 분이 보배가 되시는 것이죠. 이렇듯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시는 인생은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인에게서 이러한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반면에 "도가니"라는 영화(실화)에서처럼 믿음이 좋다고 사람들에게 칭찬받던 한 장로는 왜 그런 추한 모습을 갖게 되었을까요? 존 스토트 목사님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분을 말하고 그분을 노래하고 그분께 기도하고 그분을 증언한다. 따라서 세상은 그토록 우리의 입을 떠나지 않는 예수님을 우리 안에서 볼 권리가 있다. 사실 우리의 주장과 행위 사이의 괴리, 우리가 말로 선포하는 그리스도와 행동으로 보이는 그리스도 사이의 널따란 간격만큼 기독교의 증언을 방해하는 것은 없다."(191쪽)
존 스토트 목사님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모습을 하나님이 직접 보길 원하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원하는 바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시려고 우리를 그리스도를 닮게 하시는 중이라는 것이죠. 곧 불순종으로 손상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그리스도를 닮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188쪽). 그리고 나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하는 두 번째 이유에 대해서는 우리를 지켜보는 세상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 땅에서 사는 주님의 증인들이 그리스도를 닮아갈 때에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끌리지만, 그러지 못할 때에는 사람들이 반발한다고 하기 때문이지요(189쪽). 그렇기 때문에 신자들의 중심에는 늘 그리스도가 계셔야만 합니다. 개인의 만족과 입신양명을 위한 믿음이 아닌 내면에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심으로 그분의 형상을 이루어가는 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의 다채로운 다면체 - 8가지 주제(중보, 기초, 생명, 주님, 비밀, 목표, 사랑, 모본)
"이 책에서 그리스도께 초점을 둔 믿음과 삶이란 어떤 것인지 그 본연의 의미를 탐색하고자 하며, 그 방법으로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과 관련된 부사적 표현들을 살펴보려 한다. 언뜻 보면 별 의미 없는 짧은 문구들이지만, 잘 들여다보면 우리를 깊은 신학적 진리로 안내하는 표지판이 되어준다. 신약성경 속에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의 풍성한 관계를 그려내는 표현들이 많이 있다. 예컨대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그분 '위에', 그분 '안에', 그분을 '위해', 그분과 '함께', 그분을 '향해', 그분 '처럼'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와 그리스도의 관계는 아름답기 그지 없는 다면체 다이아몬드인 것이다."(11쪽) "그리스도인의 삶은 아무리 머뭇머뭇 미약한 응답일지라도 그 부르심에 응답할 때 시작된다. 그렇게 그분을 따르기 시작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가 다채롭게 빛나는 다면체임을 깨닫고 점점 놀라고 기뻐하게 된다."(207쪽)
존 스토트 목사님은 그리스도께 초점을 둔 인생은 그 분과 깊은 관계를 맺음으로서 변화되는데, 곧 다채로운 8가지 속성에 대해서 깨닫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영어 전치사를 사용해서, "중보(through)", "기초(on)", "생명(in)", "주님(under)", "비밀(with)", "목표(unto)", "사랑(for)", "모본(like)"으로 소개합니다. 저는 존 스토트 목사님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둔 삶에 대해서 이렇게 다양하면서도 핵심적인 것을 발견하고 제시할 수 있다는 점에 매우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철저히 성경을 기반으로 한 연구서이기 때문에 교회에서 신앙의 핵심에 대해서 공부할 수 있는 교재로서도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예수님에 대해 이토록 구체적으로 알게해 줄 뿐만 아니라 그 분을 중심으로 둔 인생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고 말하는 이 책을 더욱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기에서 8가지 주제 중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7장 '목표'에 관해서 잠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4. "그리스도를 위한" 순종, 선교, 고난, 그리고 마지막 설교
저는 존 스토트 목사님의 <제자도>에서도 7장 '의존'을 읽으면서도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도 7장에 매료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숫자 7은 정말 행운의 숫자인가 봅니다. 이 책의 7장은 "우리의 사랑이신 그리스도를 위해"(for)라는 주제로 삶의 동기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세상 최고의 동기는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갈망은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며 그분의 이름에 명예와 영광을 돌리는 삶인 것이지요(162-163쪽). 그래서 우리의 '순종'도, '선교'도, '고난'도, 그리스도를 위해서 하는 것이어야만 주 앞에서 아름다운 것입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그리스도를 위한 순종은 다른 모든 순종과 다르다고 말합니다(166쪽). 그 순종은 명령하신 분을 알고 신뢰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순종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랑의 순종은 감정에 겨워 '헌신의 찬송가'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계명을 '가지고' 그것을 '지키는'(순종)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위험과 질병과 죽음을 감수하는 선교도 그리스도를 위한 것일 때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인도와 이란에서 선교 사역을 했던 헨리 마틴 선교사님의 일화를 소개합니다. 그 일화는 그리스도가 무함마드의 옷자락을 붙들고 중단을 애원했던 이야기를 듣고 이러한 신성 모독에 영혼이 찔림을 받아 괴로워했던 이야기입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이러한 헨리 마틴의 고백을 접하면서 놀람과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합니다. 자신은 그렇게 그리스도께 철저히 동화되어 있지 않았다고 느꼈기 때문이죠. 그러면서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려는 그 열정과 질투야말로 그리스도인이 행하는 모든 선교의 가장 강하고 높은 숭고한 동기"(173쪽)라고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에서도 게오르기 페트로비치 빈스의 자서전인 <삼대에 걸친 고난>을 인용하면서, 믿음에는 고난도 함께 따라오며 주를 위한 고난도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오늘날의 교회는 박해받기 보다는 무시당하고 있다"(179쪽)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타협을 줄인다면 틀림없이 고난이 많아질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참 많은 감정이 교차함을 느꼈고 중요한 한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고난이 없는 것은축복이 아닌 불행일 수 있다는 것을 말이지요.
존 스토트 목사님은 2007년 7월 17일에 마지막 설교를 하셨는데, 그 설교 제목이 "예수님 닮는 것"이라고 합니다. 토마스 아 캠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책 제목처럼, 신자의 삶의 동기와 목적이 유일한 이름이신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라고 믿으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책의 목적 또한 삶의 중심이자 목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는 것으로 압축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그는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회복되어 활력을찾을 것이라고 말합니다(209쪽).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이 "우리의 초점을 그리스도께 두는 그것 하나"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고 있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모든 물과 피를 쏟으신 예수님과는 너무나 다른 우리의 모습은 어떤 욕심에서 연유한 것일까요? 그것은 영화 <도가니>에서 흘러나온 "가시나무"라는 노래의 노랫말처럼 우리 안에는 그리스도가 아닌 "내"가 너무도 많아서 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책 <Life in Christ>를 통해 내 삶이 "그리스도로"로 충만한 삶으로 회복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