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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 진리를 죽였는가>, 레슬리 뉴비긴, IVP.Book review 2011. 8. 14. 15:08
"나는 알기 위해서 믿는다."(credo ut intelligma) - 아우구스티누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 - 데카르트.
뉴비긴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그의 번역된 책을 다 읽어보기로 작정했다. 먼저 그의 전기를 읽었고, 이어서 <누가 그 진리를 죽였는가>를 읽게 되었는데, 이 책은 1996년에 출간된 책이면서, 2005년에 <포스트모던 시대의 진리>의 개정판이다. 뉴비긴의 책을 읽고 그에게 배우는 이 과정들이 너무나 유익하다. 이전에 존 스토트 목사님의 책을 통해서 발견한 배움의 소중함과 유사하다.
이 책은 일단 얇다. 그러나 다루는 주제가 '권위'인 만큼,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닌 것 같다. 뉴비긴은 서두에서 진리의 권위를 의심하는 '근대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서, 당시의 신앙에 회의주의적이었던 분위기를 역전하고자 시도했던 데카르트의 테제가 결국 이성과 계시를 구분(구별)함으로서 권위를 무너뜨렸다고 지적한다. 데카르트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성과 계시의 구분이, 결국 권위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성경, 교회 등에 치명적인 영향을 안겼다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지식의 주관성과 객관성 사이의 통일성이 붕괴된 것이 권위를 보는 관점이 되었고, 이러한 관점(혹은 환상)이 권위를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다.
권위를 바라보는 인식의 차이는 신학적 입장에 따라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내가 공부했던 총신은 보수적인 화란 개혁주의 노선을 따르는데, 화란 개혁주의는 주어진 계시와 전통을 존중한다(어떤 분들은 여기에서부터 답답한 마음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성경의 권위를 이해하는 방식에서 아주 잘 드러나는데, 소위 '유기적 축자 영감설'이라고 불리우는 입장을 가진다. 이 입장은 기계적 축자 영감설과는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기계적 축자 영감설은 사람의 은사와는 상관없이, '녹음기' 혹은 '라디오'처럼 하나님의 계시를 기계적으로 옮겼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유기적 축자 영감설은 사람의 은사를 사용하여 기록한 것을 하나님께서 '결과적으로' 영감하게 하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사람의 탤런트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 안에서 의미있게 사용되어 지며, 하나님의 말씀 또한 하나님의 뜻과 감동을 담고 있다. 나는 이러한 이해가 성경의 권위를 잃지 않는 건강하고 건전한 입장이라고 지금도 믿고 있다.
그러나 총신이라는 울타리를 나오면 예기는 그렇게 쉽지 않다. 나는 종교교육학(M.ed)을 다른 곳에서 하게 되었다(현재 마지막 학기를 남겨 두고 있다). 처음에는 이게 옳은 결정인지 많이 망설였지만, 지금 돌아보면 유익한 점들이 아주 많았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현대종교(신학)'의 첫 시간을 잊지 못할 것 같다. 나는 당시 '기독교교육학'이 아닌 '신학' 수업을 잘 소화해 내지 못했는데, 그것은 내가 붙잡고 있던 권위에 대한 입장이 그분들과 달랐기 때문이었다. 당시 수업 시간에서 모 교수님은 내가 '총신'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집요한 질문을 하셨다. 그 질문들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생각나진 않지만, 어쨌든 나는 그 질문들을 겸손하게 소화해 내지 못했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난처하고 불쾌한 감정을 숨기고 나와서 수강정정때 다른 수업으로 수정해 버리는 것 밖에 없었다.
나는 당시의 경험을 통해 우리 주위에는 권위에 대한 이해가 상이하고 다양함을 알게 되었다. 나의 무지함도 많이 깨닫게 되었다. 실감하게 되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성경을 이해하는 근본적인 입장이 다르다는 것이 결국 각론을 이해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와 다른 사람이 가진 사고의 시작점(출발점)이 다를때, 열린 대화를 통해서 바람직한 결론을 이끈다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는 것이다(그것이 나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상황을 뉴비긴의 설명으로 보자면, 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계시)으로부터 사고를 시작하는 것이 옳다고 믿는 입장이었지만, 그들은 데카르트의 입장을 따라 '철학' 등의 도구를 통해 성경을 비판적으로 성찰해 나가는 방식을 추구하고 있었다. 이전에는 이러한 구분에 대해서 모호하게 여겼다면, 뉴비긴의 책을 읽으면서 왜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뉴비긴은 비판적 성찰 혹은 의심의 역할은 일차적일 수 없고 부차적이라고 말한다. 오직 믿음의 역할이 일차적이라고 주장한다(16p). 그리고 전통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내면화할 것을 부탁한다. 권위는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인정하고 존경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뉴비긴은 자연신학 등이 올바른 '위치'를 인식하고 활용될 수 있다면 유익하다고 말한다. 기독교를 변증할 때, 다른 이들로 하여금 믿음의 여정을 걷게 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나는 '권위'에 대한 '관점'이 너무나도 다양해진 작금의 현실 속에서, 뉴비긴의 책이 많이 읽혀지길 기대한다. 교회와 성경의 권위 혹은 건전한 전통 아래에서 내려온 권위들을 피상적으로 해석하고 파괴하는 모든 후현대주의자들에게도 뉴비긴의 책이 읽혀지길 기대한다. 그리고 진 에드워즈의 <세 왕 이야기>를 읽고, 지나친 자기 합리화라고 비판했던 사람들에게도 뉴비긴의 책은 진지하게 읽혀지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