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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몸의 건강은, 곧 그 최소 단위의 건강에 달려 있다", <아직 끝나지 않은 길>. 레슬리 뉴비긴. 홍병룡 옮김. 복있는 사람.Book review 2011. 7. 25. 01:321. 사소한 것을 큰 사역의 중심으로 여겨야 한다.
"한 몸의 건강은, 곧 그 최소 단위의 건강에 달려 있다."
이 말은 뉴비긴이 오랜 기간 동안 신학자, 선교사, 목사로 섬기면서 깨닫게 된 사역의 기본 원리이다. 그는 하나의 공동체가 건강해지려면, 외부로부터 너무 큰 원조를 받아서도 안되며, 너무도 가난한 교회에 외국의 돈을 쏟아붇는 것은 오히려 타락을 초래할 뿐이었다고(283p) 말한다. 그래서 마을의 회중이 다른 모든 것의 토대가 된다고 확신했으며(256p), 작은 단위가 건강할 때, 유기적 관계를 기반으로 하는 전체로서의 '몸'이 건강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20세기 중후반의 위대한 인물(빛)로부터, '사소한' 것은 사역의 중심에서 소외된 대상이 아니며, 모든 문제의 본질로 여겨야 한다는 주장을 접하면서(그는 이것을 인생 전반의 사역 경험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다), 의미심장한 깨달음과 함께 내 속에서 진지한 존경심이 우러나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사소한 것을 큰 사역의 중심으로 여겨야 한다. 거대 담론을 다루면 다룰수록, 사역이 커지면 커질수록, 공동체가 커지면 커질수록, 사역과 공동체를 이루는 가장 최소 단위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것에 최선을 쏟아내는 것이 결국 전체로서의 몸이 건강해 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평생동안 하나님과 세상을 향한 질문을 멈추지 않고, '앎'을 '삶'으로 구현해 내기 위해서 평생 헌신했던 뉴비긴이 깨달은 소중한 사역의 원리였다.
2. 20세기 중반, WCC 세계 25인의 신학자 중 한 명, 뉴비긴
"8월 17일 저녁 나는 바젤에서 홀란드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삼등칸에서 침대도 없이 여행하는 중이었는데, 감사하게도 일등칸에서 여행하던 존 매케이가 나를 저녁식사에 초대하여 그와 함께 여행중이던 위대한 인물인 칼 바르트를 소개해 주었다. 그것은 짧은 만남이었고, 당시는 내가 미처 칼 바르트나 그의 신학을 제대로 알기 전이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길>을 읽으면서 흥미로워던 점은, 지금 신학교 텍스트에서나 만날 수 있는 신학의 대가들을 뉴비긴과 함께 여행하면서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그가 만난 바르트와의 이야기들, 라인홀드 니버, 에밀 브루너 등과의 언급들은 읽는 동안 계속 내 마음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심지어 바르트가 그들 중에 가장 논쟁적인 모습을 보였다(265p)는 사실조차도 바르트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언급이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뉴비긴이 당시 최고의 대가들이 형성한 그룹에서 '의장'으로서 역할을 감당했다는 점이다. 꼭 '대장'이 대단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룹을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들이 그토록 쟁쟁한 것을 감안한다면, 그것은 대단한 것이었다.
사실 나는 이전에 뉴비긴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이전에 <교회란 무엇인가>를 통해 잠시 그의 책을 접했을 뿐, 그가 얼마나 훌륭한 신학자였으며, 목사와 선교사로 살았는지, 그리고 그의 삶이 남겨준 수많은 가치에 대해서 알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번의 그의 자서전인 <아직 끝나지 않은 길>을 접하게 되면서, 뉴비긴을 철저히 연구해 볼 가치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앎에 대한 진지한 탐구 정신과 함께, 진리를 실천해 내기 위한 전적인 헌신이 수반되어 있었다. 그는 오리를 걷자고 부탁한 사람과 함께 십리를 걸어가주는 사람이었다. 실제로 그는 지나가는 걸인의 황당한 액수 요구에도 불구하고, 그 두배를 지불하거나, 그와 함께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잤다(75p)고도 한다. 이런 뉴비긴의 삶을 보면서, 거짓되고 이기적인 나의 추한 가면들을 반성하게 되었다.
어쩌면 그가 진정으로 훌륭한 대가인 이유는, 그가 세계적인 신학자 그룹의 의장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처럼 사소한 것을 가장 중요한 단위로 여겼던 것과 말씀의 순전한 진리를 '그대로' 살아내기 위해 몸부림을 쳐대는 '사소한'(겸손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지도 모르겠다.
3. WCC와 뉴비긴
"급속한 사회 변동' 사상은 어떤 일관성 있는 신학도 개발하지 못했으며, 혁명 운동을 구속 사역과 동일시할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다."
"나는 <신에게 솔직히>의 저자인 존 로빈슨을 무척 사랑하고 존경하기는 했지만, 그 책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공격하는 책이라고 나는 믿었다. 이 책은 인격적인 하나님이 존재할 여지를 남겨 놓지 않았다. 이 저서를 읽고 적지 않은 목사들이 자신의 소명을 버렸다는 사실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에 관한 논쟁은 무엇인가를 조명해 주기보다는 열기만 더한 것 같았다. 나는 그 책의 핵심 논지를 이해할 수 있었지만 결론은 수용할 수 없었고, 그 책이 미치는 나쁜 영향 때문에 무척 슬퍼했다."
나는 화란 개혁주의 신앙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얻었고, 그곳은 실제로 나의 신학적 사고와 삶이 머무는 근본적인 자리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신학적 정체성의 여부야 말로, 신앙과 교회 그리고 세상을 대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믿고 있다. 이러한 사고는 당연히 WCC에 대한 관점에 영향을 줄 수 밖에 없었고, 지금 내가 바라보는 WCC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중심성을 파괴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 거부하고 있다(간단히 말하자면 그렇다).
그러나 이로 인해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근본주의적인 혹은 폐쇄적인 사고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바이다. 예를 들어, WCC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 때문에 그들과 대화하기를 거부한 다든지, WCC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부류와의 관계를 선과 악의 이분법 구도로 날카롭게 잘라버리는 것은 반대한다. 하지만 내가 발을 딛고 있는 한국적 신학의 자리는(혹은 그 외에서도) 이러한 견해를 공론화시키기에는, 너무 미성숙하거나 혹은 대립구도가 너무나 민감한 나머지 '대화'조차 시도되고 있지 않은 실정이다. 이 말은 WCC이기 때문에, 결국 그 자체로 부정적인 의미들을 산출하게 된다고 여긴다는 말이다.
그런데 뉴비긴을 통해서, WCC가 가지는 의미와 함께 문제 많은 세상을 대처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기본 자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쉽게 말하자면 이렇다. 뉴비긴은 WCC가 진행되어온 전체적인 흐름(종교 다원주의 등)을 만든 장본인이 아니다. 그는 교회의 연합체가 필요하다는 당위성에서는 동의하지만, 신학적으로 아무 대책없이 자유로워지는 것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이고 경계했던 사람이었다. 한 마디로 어지러운 세상 속에 들어가서,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노력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WCC가 신학의 중립적인 지대가 되는 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힌다. "중립성이란것이 정당한 출발점이 될 수는 있으나 WCC의 영구적인 특징이 될 수는 없다고 나는 주장했다. 왜냐하면 WCC의 존재 자체가 교회론적인 문제에 대한 일종의 답변인 셈인 만큼, 이런 의미에서 중립성은 틀린 답변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WCC가 놓치지 말아야 할 신학의 정체성이 거론되지 말아야 할 불편한 진리로 여겨지는 것은 옳지 못한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WCC 안에 들어가서 평생동안 흔들리는 신학의 위치를 바로 잡고자 하는 일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선교사 혹은 목회자로서 자신의 사역의 자리에서 가장 작은 단위를 최선으로 여기며 사역했던 사람이었다.
나는 뉴비긴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랐던 다양한 삶의 이정표를 얻게 된 것 같아서 감사하고 있다. 오늘날 소위 성공주의 목회 패러다임이 가지고 있는 이상적인 목표가 얼마나 최소 단위를 불필요하게 여기고 있는지, 리더들이 자신의 브랜드 가치를 향상시키기 위해서 실제로는 삶의 진리 앞에 위선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 반성해야만 할 것이다. 그래서 사역의 방향성을 잃어버린 신학생, 목회자, 그리고 기독 지성인(청년 혹은 장년)들이 이 책을 본다면, 자기 성찰과 함께 삶과 사역의 구체적인 방향성을 깨닫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건 서평에서나 쓰는 말투;; 언제 서평한 번 쓸 기회가 있겠죠? 그날을 꿈꾸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