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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책 : 우리들의 책 한권(01) - 죽을 때 까지 애매하게 살았던 평화주의자, 에라스무스Book review 2012. 1. 12. 11:37
*애매한 남자 에라스무스를 생각하며, 이병우의 애매한 제목의 연주곡 "생각없는 생각"을 추천해 보아요.
Roland H. Bainton의 『에라스무스의 생애』(Erasmus of Christendom)
한정호
나의 이야기:
“피쓰메이커”가 되고 싶었던, 그래서 “트러블메이커”가 되길 피했던 나
20대 초반 어느 수련회에서 만난 선교사님은 이 시대의 청년들이 “피쓰메이커”(peacemaker)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저는 그 메시지에 깊은 인상을 받았답니다. 다툼과 갈등으로 혼란스러운 곳에서 화평케 하는 자가 되셨던 예수님처럼, 저도 세상 속에서 그런 존재로 쓰임 받고 싶었습니다. 그 이후로 그 명칭은 제 삶의 중심이자 목표가 되었습니다. 주요 인터넷 사이트 ID는 죄다 피쓰메이커가 되었고(비번은 비밀), 제가 좋아하는 사진 동아리에서도 같은 닉네임을 사용했고, “평화”라는 단어만 들어도 저의 삶과 연관성이 있다는 생각에 주의 깊게 경청했답니다. 하지만 개인적인 관심 여부를 떠나서 그런 삶을 구현해 내는 것은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삶의 불협화음을 직면할 때마다 고작 제가 할 수 있는 건 곤란할 때 침묵하는 일이었네요. 그래야 더 큰 다툼이 일어나지 않으니까. 최소한 트러블메이커가 되는 것은 피하고 싶었고, 화평케 하는 헌신이라고는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무늬만 피쓰메이커였던 것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헌신의 열매가 없는 피쓰메이커는 사실상 유명무실한 존재가 아닐까요? 아무리 좋은 슬로건을 내세운다 해도 헌신이 없으면 무익한 것이지요. 저는 이런 괴리감 때문에 수없이 저를 자책했답니다. 화평케 하는 자가 되기 위한 목표를 가지고 살았던 저의 지난날은, 사실상 화평케 한 일보다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렸던 기억만 떠오르네요. 대립과 갈등이 대치하는 상황 속에서, 저는 적극적으로 “중재”하기보다 “회피”하려고 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침묵을 택한 것이죠. 평화를 사모했지만 정작 제 안에 평안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저의 솔직한 간증입니다.
요즘 저의 고민도 역시 “헌신의 부재”입니다. 목회자로 살면서도 헌신의 열매가 없다는 것에 큰 부담을 느낍니다. 또한 시대의 아픔 앞에서도 침묵하면서 모른 척 하는 것이 저의 모습입니다. 이쪽에 서야할지, 저쪽에 서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때로는 어떤 “주의”안에 저를 가두어서 안전한 울타리를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떠오르는 “대세”안에 나를 숨겨서 은밀한 물타기를 하는 것 같기도 하네요. 저는 확실히 피쓰메이커가 아닌, 트러블메이커가 되기만을 피하면서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렇게 살아가야만 할까요? 이런 고민 중에 저는 책 읽기를 통해 유익한 도움을 많이 얻게 되었답니다.
저에게 있어서 책 읽기는 저만의 신학, 삶의 철학 등을 정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방편입니다. 물론 저는 한 권(성경)의 사람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일(나의 삶)은 하나님의 방법(말씀)대로 해야 함을 믿는답니다. 그럼에도 다양한 책을 읽는 것은 말씀의 모호한 의미를 분명하게 해석해주는 교사로서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변화무쌍한 세상과 문화를 읽고 이해하는 데에도 큰 도움을 줍니다. 그래서 저에게 책 읽기는, 삶의 철학을 정립함과 동시에 세상 문화를 세심하게 살피게 해주는 친구와도 같습니다. 저는 늘 그런 마음을 가지고 책을 대합니다. 저는 오늘 예일대학교에서 오랫동안 교회사 교수로 재직했던 롤란드 베인턴이 쓴 『에라스무스의 생애』를 읽고 간단히 느낀 점들을 쓰려고 합니다. 아주 간단하니까요. 부담 없이 읽고 함께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의 이야기: 죽을 때까지 따라다녔던 흔적 - “애매모호한 평화”
R. 베인턴은 『에라무스의 생애』(Erasmus of Christendom)에서 마지막 절에서 에라스무스에 대해 이런 평가를 내렸습니다. “살아서 그를 따라다녔던 애매함이 죽어서까지도 그를 따라갔던 것이다.”(345쪽) 에라스무스의 친구 아머바흐는 그가 7월 11일에 죽었다고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무덤의 비석에는 날짜가 12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당시 그리니치 표준시가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이런 에라스무스의 죽음을 바라보며 베인턴은 애매함이 죽어서까지도 따라다녔다고 언급한 것입니다. 심지어 그의 출생일도 그러했다고 전해집니다.
그 외에도 에라스무스에겐 많은 수식어들이 따라 다녔는데요. “사려 깊은 회의주의자”, “지친 자유주의자”, “세계시민주의자”, “교양인”, “심령주의”(Spritualism), “혼합과 중용” 등 수많은 수식어들이 그의 명성에 덧붙여졌습니다. 그런데 하나같이 비슷한 줄기에 놓여진 단어들이네요. 그 줄기는 결국 긍정적인 면에서는 “평화주의자”이지만 좀 더 정확히는 “애매모호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평화를 위해 루터의 진리를 외면했습니다. 또한 어디에서나 환영받았지만,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혼합해서 화합의 정신을 구현해 내려고 했으나, 그가 낳은 알을 루터가 부활(종교개혁)시켰습니다. 이처럼 그의 삶에는 “양면성”과 “애매모호함”이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던 것이지요.
하지만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랍니다. 에라스무스는 자신의 신념(believe)보다 신앙(faith)으로 헌신의 열매를 거둔 인물이었습니다. 자신의 믿음에 전 생애를 걸었던 것이죠. 그런데 단지 그 결과가 “애매함”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저처럼 근본적인 삶의 철학이 없었기 때문에 애매하게 행동한 것이 않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가 믿은 대로 행한 것이 애매함을 낳았던 것입니다. 제가 베인턴의 책을 읽으면서 흥미로웠던 것은, 그가 루터나 에라스무스에 대해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었던 인식을 허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책 읽기를 통해 누리는 심화의 기쁨아닐까요?
베인턴은 다음과 같이 평가합니다. “루터는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것만큼 폭력적이지 않았고, 에라스무스 또한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것만큼 부드러웠던 것도 아니다”(325쪽). 우리는 흔히 루터에게서 공격적인 이미지를, 에라스무스에게서 유연한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그런 설명이 심플하니까요. 하지만 베인턴은 조금 다른 측면에서 신중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루터는 말하기를 평민은 자신의 요구를 해소하기 위해 검을 사용해서는 안되며, 합법적인 통로를 통해 시정을 하도록 노력하되, 이 모든 것들이 실패한다면 오로지 기도를 통해서 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하였다.”(325쪽) 루터는 조급함과 폭력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개혁은 합법적인 방식으로만 해야한다고 생각한 것인데요. 이런 이미지는 우리가 떠올린 루터의 저돌적인 개혁 방식과는 너무 다르게 보이지 않나요? (사실 베인턴이 쓴 루터 전기에도 루터는 과격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반면에 에라스무스는 루터와 다르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누군가가 파멸되어야 한다면 그가 몽둥이로 맞아 죽든 단검으로 찔려 죽든 그것이 무슨 문제이겠는가?”(353쪽). 에라스무스는 ‘풍자’를 통해 시대의 부조리에 대항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표현은 신랄했습니다. 중용과 연합을 추구했던 사람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표현입니다. 실제로 그의 여러 가지 견해는 루터와 루터주의자들 혹은 재세례파들의 급진적인 개혁자들에 의해서 구현되었습니다. 그가 낳은 알을 종교개혁자들이 부화시킨 것이지요. 그는 절대로 침묵하지 않았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견해를 공적으로 밝힘으로서 좀 더 나은 견해가 있는지를 민주적인 방식으로 탐구하고자 했습니다. 이런 점은 루터에게서 에라스무스를, 에라스무스에게서 루터를 보게 합니다.
그럼에도 에라스무스의 전 생애는 진리보다는 평화를, 갈등보다는 일치를 추구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루터는 그에게 “당신의 신학은 평화를 애호하는 것일지 모르나 당신은 진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244쪽). 그에겐 루터의 용감한 진리추구보다 중용과 관용의 정신이 반영된 세계시민주의가 더욱 매력적이었던 것이지요. 다음의 문구는 에라스무스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잘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성서의 말씀과 교회의 신조들을 넘어서는 모든 것에 대해서 나는 회의주의자이다”(242쪽). 그는 진리를 추구하는 자세에 있어서도 친절함을 추구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당대의 “교양인”(the cultivated man)의 모델로 평가되며, 가톨릭과 루터주의자들 사이에서의 “피쓰메이커”였습니다.
그럼에도 에라스무스는 전 생애를 애매함으로 살았지만 그 것 조차 일관성이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에겐 싸움을 수습하는 자로서의 사명이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저처럼 원칙이 부재했던 사람이 아니었고 화평과 일치를 목적으로 살고자 헌신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신조들의 범위를 넓히기 위해서 교리의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했고, 종교의 자유를 위해 이 구분을 널리 사용했던 첫 번째 인물이었습니다.
교육 이념에서도 그는 당대의 지혜(고전)를 배척하지 않았고 신앙과 혼합하려 했습니다. 일방적인 강요보다 설득과 합의를 추구했으며 온유한 자세를 유지했습니다. 결정적으로 기독교의 윤리를 보존하고자 하나님의 전능함을 뒤로 후퇴시키기도 했습니다. 루터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 되시게 하라”고 말했다면, 에라스무스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선하신 분이 되게 하라”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는 평생을 평화와 일치의 정신을 추구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Roland H. Bainton, 1894년 3월 30일~1984년 2월 13일)
우리들의 책 한권: "진리와 평화 사이에서"
사실 제가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는, 먼저 에라스무스라는 인물보다는 롤란드 베인턴이라는 저자에 대한 매력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이전에 R. 베인턴이 쓴 『마틴 루터의 생애』(Here I Stand)를 읽으며 큰 감명을 받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그 책을 제가 추천하는 도서 중에 한 권으로 사람들에게 늘 권유합니다. 그래서 그가 쓴 전기라면 믿고 읽을 수 있겠다고 기대했던 것이지요. 또 다른 기대는 제 삶에 대한 변명이었습니다. 이것이 더 중요했지요. 저는 에라스무스에게서 애매하게 살아왔던 지난 날의 제 삶에 대한 변명거리를 찾을 수 있을까 기대했었습니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의 정신에 동의하면서도 침묵했던 그가, 저에게도 중요한 자기 합리화의 단서를 제공할 수 있는 사람이진 않을까 기대했던 것이죠.
하지만 그는 중요한 사항 앞에서 애매하게 행동하던 저와는 다른 전 생애를 연합과 일치에 헌신한 사람이었습니다. 저와는 완전히 반대의 인물인 것이죠. 그래서 그는 루터의 과장보다는 용서와 인내로서 당시 교회와 교황의 여러 가지 부조리들을 일시적인 실수로 여겼던 것입니다. 평화를 위해 진리의 문제를 약화시킨 것이죠. 그래서 그의 삶에는 평화와 진리 사이에 존재하는 딜레마의 문제가 놓여 있답니다. 그는 결코 무질서한 진리 전쟁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애매함을 낳게 된 것이지만.
그렇다면 에라스무스의 삶의 목적이었던 “화평”이 저와 우리의 삶에 던지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의 생애에서 진리와 평화가 양립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화평을 추구하며 평생을 살았던 그 조차 지속적이고 완전한 화평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진리 간 대립과 전쟁 만을 목격했던 것이죠. 우리가 사는 오늘도 그 때와 비슷해 보입니다. 보수와 진보의 양극단은 있을 뿐 중간은 없습니다. 중간은 곧 보수에게는 진보이며, 진보에겐 보수가 됩니다. 범죄의 소식은 끝나지 않고, 교회가 세상의 소망이 아닌 비판의 대상으로 전락하였습니다. 그 어디에도 공의와 화평의 소식이 들리지 않습니다. 평화는 이상적인 허구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그가 추구했던 평화의 정신은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진리를 가진 자로서 세상의 고통에 더욱 귀를 기울여야만 할 것입니다. 자신이 지지하는 쪽을 위해서 반대를 위한 반대의 공격을 멈추어야만 할 것입니다. 개인의 평화를 위해서 이웃의 평화가 허물어지는 일이 없어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에겐 그가 추구했던 공동의 평화의지가 필요합니다. 물론 본질이 아닌 비본질에서의 자유이지만, 모든 상황에서 화평케 하는 자로서 살아야만 하지 않을까요? 그것이 애매한 결과를 낳는다 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