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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책 한권(02) - "헨리 나우웬의 삶,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Book review 2012. 1. 19. 11:18
Give Me Jesus - Fernando Ortega Ruth Graham Tribute
채혜진
나는 글을 쓰고 싶다. 아니, 글을 잘 쓰고 싶다. 언제부터 글이 내 삶에 들어왔는지 정확치 않다. 아주 어릴 때 부터였을 수도 있고 성인이 된 후였을 수도 있다. 방금도 헨리 나우웬에 관련된 글을 편지형식으로 쓰던 중이었다. 그런데 글을 쓰며 나에게 기쁨이 없었다. 처음부터 계속 답답했다. 가슴 가운데 초조함이 가시질 않았다. 바라는 대로 술술 쓰이지 않아 화가 났다.글을 쓸 때의 이 답답함과 초조함과 화는 어디서부터 비롯되었을까? 글을 잘 썼으면 좋겠다는 욕구인가?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한 구조를 갖춘 글, 누구나 읽어도 감동을 얻을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는? 그렇다면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욕구는 왜 생겨났을까? 글을 통해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얻고 싶어서일까? 내 글이 비난을 얻거나, 누군가에게 실망을 줄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가세하지 않았을까?
자신을 향해마이클 오로린이 쓴 <그의 삶, 그의 꿈 헨리 나우웬>(가치창조, 2008)을 읽었다. 나는 그 책을 읽고 이렇게 저렇게 글을 써보려 시도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쓰다 보니 솔직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필요한 수사가 많았다. 정말 감명을 받았는지 그런 척 하는지도 의문이었다. 그래서 지금, 내가 왜 글을 쓰고 있는지 솔직하게 고민하며 다시 처음부터 글을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나우웬의 글이 많은 이들에게 큰 영향을 준 것은 그의 처절한 자기 직면 때문이었다. 그는 자기를 썼고, 경험을 썼다. 다른 사람은 쉽게 드러내지 못할만한 마음의 요동과 싸움이 그의 글에서는 훤히 드러났다. 뉴욕의 제네시 수도원에서 7개월 동안 머물며 쓴 기록인 <제네시 일기>(포이에마, 2010)의 소개 글은, “가혹할 만큼 정직하게 자신의 존재와 직면했던 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내놓은 가장 탁월한 영혼 보고서”이다. 내가 헨리 나우웬을 좋아하게 된 것이 바로 이 이유였다. 자신 안에서 발견한 모순과 연약함에의 직면, 그 고백에서 '어쩜 나와 이렇게 같을까!'라는 공명이 있었다. 마이클 오로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헨리 나우웬은 문제들을 추상적으로 난해하게 다루지 않았다. 그에게 강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거나, 그 주위에서 그에게 개인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글을 쓰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물론 헨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매우 사적이고 개인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일과 느낌을 솔직하게 탐구함으로 그의 독자들을 놀라게 하고 다소 충격을 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기"로 한 결단의 한 부분이기도 했다. 그것은 때때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숨기고 있는 힘든 경험들까지 드러내는 것을 뜻했다."(203)
헨리 나우웬은 살아가는 내내 사람들과의 친밀한 관계를 열망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사람들에게 거절당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려야 했다. 존경받는 국제적 작가, 예일, 하버드 대학교의 교수와 같은 번쩍이는 딱지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연약함을 숨기지 않았다. 끝없이 내면을 파고들고 점검했다. 하나님께 마음을 솔직히 고백하고 사람들에게 공유했다. 그에게서 사라지지 않는 이 ‘가시’ 때문에 그는 더욱더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아야 했다. 그리고 이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었다."아주 쉽게 덧나면서 다시 피를 흘리기 시작하는 내면의 상처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상처는 수년 동안 나를 떠나지 않고 내 속에 있는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상처다. 이 상처가 -거절당할 것에 대한 엄청난 두려움과 사랑 받고 싶은 엄청난 욕구가 - 아주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그 상처가 사라지지 않고 있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마도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통로와 영광에 이르게 하는 출입구와 자유롭게 하는 길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Sabbatical Journey 중에서 (223)
나 또한 사람들과의 관계가 두렵다. 나를 꺼내놓고 나를 주는 것이 힘들고 어렵다. 상처받을까 무섭고 버림받을까 겁이 난다. 상대방의 흔들리는 눈빛이나 건조한 말 한마디가 뒷걸음치게 한다. 뛰어가는 나를 못 본 채 하고 매정하게 떠나는 버스에게 버림받음의 좌절을 느낄 때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나의 마음과 생각, 소유와 삶을 자유롭게 나누기가 힘들다. 나도 나의 이 '가시'가 완전히 사라질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를 이유 없이 주시지는 않으셨을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헨리 나우웬의 고백에서 위로와 힘을 얻는다.
다른 사람을 향해
관계가 어렵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는 함께 살기, 공동체를 향한 열망이 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 모든 것과의 화해를 이루셨다. 세상을 향해 '샬롬'을 선포하신 것이다. 그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관계는 어떤 외부의 위협에도 끊어지지 않는다. 그런 공동체를 살고 싶다. 마음을 나누고, 생각을 나누고, 소유를 나누고 삶을 나누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강력하게 연결된 공동체 말이다.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사는 라르쉬는 헨리 나우웬에게 그 같은 공동체였다. 그는 하버드 교수직을 떠나 캐나다의 라르쉬 데이브레이크에서 지내는 선택을 했다. 그것은 인생의 남은 시간을 때우기 위함이 아니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이 그를 하버드에서 떠나게 했고, 공동체로 이끌었다. 라르쉬는 그에게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과 같은 도전이었다. 그는 "쉰네 살의 국제적인 명성을 누리는 세련된 대학 교수지만 간단하고 실제적인 일들 -차를 운전하거나 식사를 준비하는 일 등- 에 대해서는 무능“(159-160)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애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통해 그는 “스스로를 사랑하며 인정받기 위해 다른 누군가가 되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167)을 배웠다. 라르쉬의 사람들은 지금 여기에서, 자기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았다. "그들은 책을 읽지도, 증오심을 품지도,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도 않았다. 마음이 상한 사람은 그 상처를 그대로 드러내 보였다. 행복한 사람은 그 기쁨을 터뜨렸다. 그렇게 솔직한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헨리와 라르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복음에 더욱 적합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를 볼 수 있었다."(166-167) 공동체 속에서 그는 자신의 연약함, 즉 뿌리 깊은 수치심과 친밀한 교제와 사랑에 대한 열망에서 오는 고통을 치유하고 회복했다.
하나님을 향해
어떻게 살아야 삶이 의미가 있을까? 눈을 뜨고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노래를 듣고 책을 읽고 글을 쓴 그다지 특별할 것 없었던 오늘은 의미가 있을까? 원하지 않는 일을 해야 했던 어제는 의미가 있을까? 원하고 바랐던 걸 얻은 그 날이 의미 있을까? 어떠한 일도 할 수 없어서 그냥 무력하게 서있던 그 때의 시간은 무의미할까?
'찢겨진 빵과 부어지는 포도주'. 이는 오스왈드 챔버스의 묵상집 <주님은 나의 최고봉>(토기장이, 2008)에 나온 표현이다. 사람을 철저한 피동적 존재로 말하는 이 표현을 처음 보았을 때는 불편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앞에서, 이 표현이 슬며시 내 안에 다시 떠올랐다. 그리고 나는 조금 깨달았다. 세상과 인생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에게, 찢겨진 빵과 부어지는 포도주가 되는 것, 그보다 영광스러운 삶은 없는 것 같다고. 내가 무엇을 하고 안하고, 내 욕구가 충족되고 말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 안에 살아계신 하나님이 중요하다고.
말년의 헨리 나우웬에게서도 이 같은 생각을 엿볼 수 있었다. 그는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며 하나님께 축사를 받으셨고, 십자가 위에서 찢기셨고, 그리고 세상에 자신을 주셨"(209)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신자의 삶도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들리고 축사되고 찢기고 주어진다"(210)는 걸 깨달았다. 하나님께 선택된 우리는 아들, 딸로서의 축복을 얻는다. 살며 경험하게 되는 고통에 상처받고 깨어지지만, 그 깨어진 삶을 통해 우리는 이 세상에 자신을 나눌 수 있게 된다.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IVP, 2002)
별은 하늘로 돌아가 영원히 빛난다
이 땅의 모든 삶은 하나님 안에 있다. 하나님과 함께 살기 위해 분투한 삶은 더욱이 특별하다. 기쁨, 아픔, 슬픔, 행복, 고통이 모두 의미가 있다. 그 삶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현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삶은 어두운 밤하늘을 밝히는 별이 된다. 깜깜한 하늘과 같은 이 땅에 아름다운 그림을 수놓아가는 하나님의 그림의 일부분이다.
나는 이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헨리 나우웬을 잘 모른다. 고작 그가 쓴 몇 권의 책과 그의 지인이 쓴 전기를 읽었을 뿐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삶을 읽는 것은 의미 있다. 그의 삶 속에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크신 하나님과 작은 인간이 함께 하는 그 신비, 탄생에서 죽음으로 이어지는 한 사람의 삶은 하나님의 장엄한 세계 속의 빛나는 별이다. 그 별은 영원한 곳에서 영원히 빛날 것이다. 그래서 삶은 의미가 있다.
"수많은 두려움, 이 세계가 보내는 경고 앞에서 종종 굴복하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우리의 짧은 생애가 출생과 죽음이라는 경계 너머로 이어지는 훨씬 더 장구한 사건의 일부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믿는다. 나는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분, 다시 집으로 돌아와 배운 것들을 이야기하기를 기다리시는 분 때문에 나의 짧은 생애가 매우 신나고 즐거운 사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Henri Nouw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