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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책 한권(인문학-02) - "여기 제가 있습니다" 『타인의 얼굴』, 강영안. 문학과 지성사.Book review 2012. 11. 22.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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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제가 있습니다(Me Voici)
-강영안의 『레비나스의 철학 타인의 얼굴』-
임고운
타인이 나를 부른다.
언젠가 연변에 갔을 때 보았던 북한 엄마와 조선족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조선족 남자 아이 T의 눈빛, 그리고 고등학교 때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보여주셨던 북한 꽃제비 영상에서 봤던 북한 아이들의 눈빛, 나는 그것을 늘 잊지 않고 있다. 그 눈빛이 나로 하여금 아이들을 바라보게 했고, 아이들을 위한 일을 하리라는 일종의 소명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얼굴은 나에게 어떤 응답적 책임을 요청했고, 나는 그것을 그 순간 의식했다. 내가 뭔가를 해야겠다는 의무로 세상을 향해 눈을 들기 이전에 먼저 그들이 나를 바라봐준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에 응답해가려는 마음으로 지금도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비단 그렇게 꼭 어렵고 가난한 삶 가운데 처해있는, 내가 살고 있는 이 지역과는 거리가 먼 제 3세계에 사는 사람들의 눈빛만이겠는가? 바로 내 가족, 내 옆집 이웃, 내 동료들의 눈빛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 이외의 다른 모든 이들. 내 입장에서 ‘타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 그러나 나와 가까운 이들의 얼굴은 그 시선조차 제대로, 정직하게 마주치기조차 쉽지 않다. 너무나도 쉽게 내 시선 속에서 무시되어버린다. 나와 같은 경쟁 상황에서 살아가야 하는 라이벌로서 나는 그들에게 결코 호의적일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분주한 삶 속에서 가끔 나타나 베푸는 호의는 존경받아 마땅한 굉장한 선행이 된다. 동시에 나에게 타인은 내가 살아남기 위해 제거해야 하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타인에 대한 이런 의식으로는 윤리란 인간의 한계를 동반한 의무 그 이상은 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질문을 던져보자. 성경 누가복음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에게 강도만난 자는 누구인가? 왜 도와주었는가? 그의 선행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의무인가, 책임인가?
타인을 보는 시선- 여기 제가 있습니다.
‘타인(이웃)은 나에게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가슴에 담고, 유대인 철학자 레비나스(1906~1995)의 말에 귀 기울여보자. 레비나스가 ‘타인’을 보는 시선은 사뭇 도발적이다. 그러나 따뜻하다.
먼저 레비나스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자면, 그는 리투아니아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히브리어 성경과 러시아 문학을 읽으면서 자랐고 독일 철학자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에 정통하였으며, 이후 1923년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여 공부한 뒤 프랑스인으로 귀화하여 프랑스 철학과 함께 숨 쉬고 생각해 온 철학자이다. 프랑스 일간 신문 『리베라시옹』은 그의 이런 삶을 평가하며 ‘네 문화의 철학자’라고 불렀다. 레비나스는 자신의 철학을 ‘주체성의 변호’라고 소개했다.
레비나스는 (존재 유지를 위한 이기적인 본능을 가진) 타인과 나 사이에 영원한 평화를 모색하기 위해 ‘주체성’의 개념을 다시 규정지을 필요가 있다고 보고, 인간과 세계, 나와 타인, 진리와 정의, 자유와 책임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다시 바르게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자유를 기초로 한 책임이 아니라 나의 자유에 선행된 책임이다.
“타인은 한 마디로 유일하며 독특하다.”
타인은 결코 나로 환원될 수 없는 ‘낯선 이’다. 타인과 나의 차이는 절대적 차이인 것이다.
전적으로 다른 타인. 그것은 나와 관계있는 주변 세계, 역사, 문화, 체계 등이 타인에게는 전혀 의미를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나대로, 그는 그대로. 타인은 그에게 의미를 준 또 다른 맥락 속에서 온 존재이기에 그렇다. 이것은 ‘구별’이 아니라 ‘다름’이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타인의 출현은 ‘전체성의 깨뜨림’, ‘맥락 없는 의미화’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그 ‘타인’이 호소한다. 비천함에 처한 타인의 호소가 나의 자유에 문제를 일으킨다.
누가복음의 비유를 다시 꺼내어보면 강도만난 자의 존재가 사마리아인의 가던 발걸음을 불편하게 만든 것이라고 할까?
레비나스는 이때 비로소 윤리적 관계가 등장한다고 말한다. 나의 자발성을 타인의 현존으로 문제 삼는 일. 윤리는 나의 자유가 문제시될 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그 호소는 나에게 고통으로 다가온다. 나만이 누리던 자유가 부당함을 일깨우고 타인을 수용하고, 내 것을 내어놓고 타인을 환대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응답을 요구하는 타인의 부름에 내가 ‘응답’할 때, 나를 ‘응답할 수 있는’ 존재로 세울 때 나는 비로소 ‘응답하는 자’로서 ‘책임적 존재’ 또는 윤리적 주체로 탄생하게 된다.
“타인을 위해, 타인에 의해 내가 책임적 존재가 된다는 것은 곧 내가 응답적 존재가 된다는 뜻이다.
책임짐은 응답함이고 응답함은 부름이나 요청에 반응함이다.”
레비나스는 타인에 대한 책임을 ‘근원적 또는 근원 이전의 말함(le Dire original ou pre-original'이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곧 ’타인의 대한 응답‘으로서 “여기 내가 있습니다.”라고 부름에 나를 내어줄 때 구체적으로 표현된다고 본다.
“‘여기 내가 있습니다’는 나 자신을 타인에게 내어놓고 타인의 처분을 기다리는 것이다.”
이 책임은 타인에 대한 나의 선호나 감정과 무관하다. 나는 그저 응답할 뿐이다.
우리 모두는 이렇게 서로 각자에게 응답적 존재로서 관계한다.
“책임은 어떤 특별한 사람, 몇몇 엘리트의 전유물이 아니라 인간을 인간이게,
주체를 주체이게 하는 조건이 된다.”
그러므로 타인은 오히려 나에게 책임을 일깨워주는 존재가 되며, 나를 살아 있게 만들고, 고귀한 영적 존재로 만들어주는 대상이다. 그렇다면 선택은 두 가지다. 사마리아 인처럼 부름을 수용하든지 아니면 제사장과 레위인 처럼 거부하든지! 여기서 레비나스는 그 책임을 거부하는 것은 윤리적 의미의 ‘악’이라고 보며, ‘타인에 대한 책임 유기’라고 명한다. 그럼 이와 대비하여 선을 행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환대’하는 것이다. 타인을 나의 손님으로 대접하고 선행을 베푸는 일.
“타인의 부름 앞에 ‘여기 제가 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을 내어놓는 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를 주격으로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대격으로, 목적어로 내어놓고 나의 반응을 요구하는 부름에 응답한다는 것이다. 응답, 환대 또는 책임은 ‘줌’이고 ‘자신을 희생함’이다. ‘주는 것, 즉 타자를 위한 존재란 자신의 입에서 빵을 꺼내어 자기는 굶주리면서 타인의 허기를 채워주는 것이다.”
여기서 ‘줌’은 계산이나 욕망이 개입되지 않는 순수한 줌이다. 그러나 이는 경제적인 차원, 물질적인 차원을 동반한다. 타인을 선대함은 나의 구체적인 비움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는 과정과 비슷하다. 나아가 ‘줌’에서 오는 쾌락조차도 포기해야 실제로 되돌아옴이 없는 순전한 줌이 가능하다. 내가 좋아하고 내가 아끼며 내가 사리는 나의 몸, 나의 살, 나의 마음을 내어놓지 않는 줌은 없는 것이다.
“나의 집과 나의 소유, 나의 지식을 타인을 섬기는 수단으로 사용하라는 것이 타인의 얼굴이 나에게 호소하는 윤리적 요구이다. 궁핍 가운데 있는 이웃을 그저 공감이나 연민으로, 나의 소유를 내어놓지 않고 빈손으로 대하는 것은 공허하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꽤 어려운 책이었다. 한 장 한 장 읽어가는 것이 쉽지 않은 책이었지만, 그의 사상을 종합적으로 요약해놓은 듯한 ‘책임과 대속적 주체’라는 챕터는 강렬했고 도전을 주었다. 타인과 나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다시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었던 레비나스.
지금 내 옆의 사람들을 잠시 바라다보자. 그의 눈은 무엇을 요청하고 있는가? 나는 무엇에 응답하고 있는가? 레비나스의 사상을 잘 요약해준 강영안 교수의 글을 읽으며, 어느 새 공허해진 내 빈 손을 다시 쳐다보게 되었다.
“여기 제가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이는 어떤 욕심도 없다. 그저 부른 자리에 응답하며 있을 뿐이다. 골고다 언덕 위에 십자가 지신 예수님처럼, 주께서 쓰시겠다 할 때 갔던 어린 나귀처럼, 강도 만난 자에게 다가간 사마리아인처럼. 또 넓은 들판에 배고픔을 가지고 모여든 5천명 이상의 사람들 앞에 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계속 계시며 허기를 채워주신 예수님처럼.
‘이웃’이라는 말조차 더 이상 따뜻하게 다가오지 않게 된 이 시대 속에서 우리 각자가 서로에게 책임적 주체, 응답적 주체로서 관계한다면, 우리를 보시는 하나님의 눈으로 서로를 바라본다면, 다시 새롭게 희망을 그려볼 수 있지 않을까 소망해본다.